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X JAPAN (문단 편집) ==== 인디 시절 ==== [[파일:external/galeon.hispavista.com/XP.jpg|width=500]] 1982년, 고교 2학년 때부터 함께였던 X의 오리지널 멤버인 [[Yoshiki|요시키]](드럼), [[Toshl|토시]](보컬), TERRY[* 본명: 이즈미사와 유우지](기타) 3명은 고등학교 졸업 후, 록의 세계와 승부하는 마음을 몇 번이고 다짐하며 [[타테야마]]를 뒤로하고 [[도쿄]]로 상경한다. [[1984년]] [[3월]] 말, 밴드의 리더였던 [[Yoshiki|요시키]]는 혼자 [[도쿄]] [[나카노구]] [[에코다역|에코다]]에 고급맨션을 얻는다. 어머니는 [[Yoshiki|요시키]]의 은행계좌에 생활비로 매달 50만엔 입금을 약속하고 있었다. 투자가로서 나름 성공한 어머니 덕분에 돈 걱정은 없었지만, [[Yoshiki|요시키]]는 곧 일자리를 구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없었던 [[Yoshiki|요시키]]는 [[시부야]]의 싱싱싱(シング・シングシング)[* 가타카나 그대로 발음하면 "싱구싱구싱구"다. 영어 Sing을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이라는 카페 레스토랑에서 시급 500엔의 웨이터로 저녁 5시부터 밤 12시까지 일하게 된다. 우선 활동의 거점이 되는 라이브 하우스를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밴드로 활동을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 구체적인 방법을 전혀 알지 못했다. [[도쿄]]에는 친구도 없고 밴드 활동에 필요한 절차를 물어볼 수 있는 업계 관계자도 없었다. 활동의 실마리는 직접 찾는 방법밖에 없었다. [[Yoshiki|요시키]]는 우선 정보지 "피아"를 구입해, 라이브 하우스의 페이지를 열어 닥치는 대로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가게 주인과 직원을 만나고 직접 "여기서 공연하고 싶습니다."라며 부탁하며 다녔다. 요시키를 만난 라이브 하우스 직원들은 "또 아마추어 밴드의 청년이 찾아왔군." 하며 매정한 태도를 취했다. 업소마다 각기 취급하는 장르가 있기 때문에 무조건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록음악을 한다고 말하면 록밴드는 받지 않는다는 곳이 많았다. 그러면 요시키는 메모를 하고 다음 가게로 가서 다시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시키는 한 라이브 하우스의 주인에게 데모 테이프를 가져와보라는 말을 듣게 된다. "너, 빈손으로 왔어? 그럼 안 되지. 데모 테이프를 가지고 와봐. 듣고 괜찮다면 생각해볼게." 이 말을 들은 요시키는 데모 테이프의 녹음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우선 베이스 멤버가 필요했다. 만일 X가 공연이라도 이미 하고 있었다면 연주나 스타일을 보고 마음에 들어한 사람이 찾아올 가능성이라도 있었겠지만, 공연도 못하는 상황에 그런 멤버가 갑자기 나타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우선 음악 잡지의 《밴드 멤버 모집 코너》에 베이스와 기타를 찾고 있는 글을 게재하고 응모자의 오디션을 하기로 했다. 이윽고 잡지에 실린 멤버모집광고를 보고 연락해온 기타리스트들과 베이시스트들이 찾아왔고, 오디션이 시작되었다. 신청해온 사람들은 [[Yoshiki|요시키]], [[Toshl|토시]], TERRY보다 오히려 경험이 더 많아보였다.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짧은 머리의 X 멤버들은 새 멤버 모집에 응모한 사람들의 허리까지 오는 머리스타일을 보는 것만으로도 주눅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오디션에 모인 사람들은 X의 제각기 연주랑 겉모습에 대해 비판하며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도 멤버는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응모자를 기다릴 수만은 없어서 결국 스스로 멤버를 찾으러 움직였다. 그 무렵 [[Yoshiki|요시키]]는 고등학교 시절의 1년 선배인 토쿠오 아츠시를 도쿄에서 재회한다. 요시키가 프로 데뷔를 목표로 하고 있음을 알게 되자 아츠시는 자신도 밴드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요시키는 베이시스트로서 그를 X에 영입하기로 했다. [[Yoshiki|요시키]]가 원하던 트윈기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Yoshiki|요시키]], [[Toshl|토시]], 아츠시, TERRY 4명으로 출발하게 된 X는 드디어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요시키는 자신의 곡을 편곡하고 각각 연주자의 파트별 악보를 썼다. 보컬 토시를 위해서는 감정의 억양까지 자세히 기록한 보컬용 악보를 만들기도 했다. 요시키는 꼬박 하룻밤을 새며 계속해서 악보를 썼지만, 그래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다. 얼마 후 X는 [[시부야]] 도겐자카 근처에 있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이루어지는 오디션 형식의 라이브에 출연 할 수 있게 되었다. 목적은 오로지 무대에 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무대가 X 멤버들에게는 기념해야 할 첫 라이브가 틀림없었다. 당일 티켓은 1장에 500엔으로, 밤무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기회였지만, 무대에 올라 연주할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 그저 기뻤다. 하지만 X를 보러온 고객은 고작 20명 정도였다. 상상했던 고조적인 라이브 하우스의 분위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가 실내 공간을 열기로 숨이 막힐 정도의 진짜 콘서트를 할 것이라고 멤버들은 다짐했다. 그러한 생각은 그대로 데모 테이프 제작의 열정으로 변했다. 도쿄에 상경한지 약 1년 만에 비로소 데모 테이프가 완성되었다. [[1985년]] 2월, [[타카다노바바역|타카다노바바]]의 임대 스튜디오를 1시간에 1만 엔으로 빌려서, 요시키 작사/작곡의 "ILL KILL YOU", "We are X", "Stop Bloody Rain" 3곡을 데모테이프에 녹음했다. 데모 테이프를 만들기까지는 엄청나게 많은 연습을 했다. 덕분에 임대 스튜디오 대여료와 녹음 기자재 대여료는 더없이 늘어만 갔다. 요시키는 아르바이트비도, 월세와 식비를 빼고 남은 돈은 모두 연습과 제작비용에 쏟았다. 데모 테이프가 완성되자, 즉시 다음 행보에 나섰다. 이미 무대에 서고 싶은 라이브 하우스를 파악하고 있던 요시키는 더빙한 데모 테이프 몇 개를 가지고 원하는 라이브 하우스에 가서 배포하기 시작했다. 꼭 들어달라고 부탁하자 대부분의 라이브 하우스는 바로 테이프를 받아 줬다. 라이브 하우스의 직원들 사이에서도, 요시키의 열정은 다들 알고 있었다. 데모 테이프를 배포하고 곧 대망의 라이브가 결정되었다. 장소는 '시부야 다락방'이라는 이름의 라이브 하우스였다. 요시키와 멤버들은 실전을 위한 레파토리 연습을 반복했다. 데모 테이프에 담은 3곡으로 공연의 준비는 치열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요시키는 손님 유치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밴드가 정기적으로 무대에 서게 되면 티켓판매율에도 힘을 기울여야 했다. 라이브 하우스에 출연하는 경우에는 어떤 밴드든지 티켓을 팔아야할 할당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표가 잘 팔리는 밴드는 라이브 하우스의 정식 연주팀 되는 것이 허용됐지만, 만약 표가 팔리지 않으면 부족한 만큼 멤버들이 직접 표를 사서 메꿔야 했다. 그래서 요시키는 [[타테야마]] 도내의 고교 동창생들에게 연락을 취하며 라이브를 보러 와달라고 부탁했다. 덕분에 라이브 당일, '시부야 다락방'은 초만원이었다. 마이너한 장르인 하드 록과 헤비메탈을 들려주는 라이브 하우스에 일반대학생들이 200명이상 몰려든 것이다. 동창들이 모인 가게 안에는 마치 학급동료의 생일 파티 같은 친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가게를 완전히 가득히 메운 관객들을 둘러보며 라이브 하우스 직원은 놀랬다. 첫 라이브를 하는 신인 밴드가 가게 안을 가득 채웠던 경우가 그동안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X의 손님몰이는 일회성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여러 개의 라이브 하우스에서 "X는 어떤 밴드보다 손님이 많이 들어온다." 라는 평판이 돌았다. 가게를 초만원으로 만드는 X의 존재는 하드 록이나 헤비메탈 팬들에게도 알려지게 되고, 친구나 지인이 아닌 일반관객도 티켓을 사서 라이브로 몰려갔다. 더욱이 라이브 하우스와 상관없는 곳에서도 X의 팬이 되는 사람도 많이 나타났다. 술집에서 술 마시면서 의기투합해 라이브를 보러오는 것을 약속하기도 하고, 학생이나 샐러리맨, 요시키와 밤거리에서 싸움한 뒤 화해하며 친해진 밴드들 등이 X의 콘서트에 차례로 구경 오기 시작했다. 1985년의 봄이 되자 매달 5~6개의 라이브가 생기게 되고, '시부야 다락방', 'LA.mama', '록 하우스 EXPLOSION', '요츠야의 FOURVALLEY' 같은 인기의 라이브 하우스가 X의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라이브 때마다 모이는 손님은 생각 이상으로 늘어갔고, X의 라이브 티켓은 내놓자마자 매진되었다. 요시키는 연주뿐만 아니라 무대 연출을 어떻게 하면 더 X를 어필할 수 있을까를 종일 고민했다. 눈길을 끌기 위한 모든 수단을 강구했다. 라이브 매출의 모두는 화려한 의상과 과격한 연출을 위해 쓰였다. 연주와 연출, 특별하고 화려한 X를 한층 더 과격하게 보이는 장치는 여러 가지가 등장했다. 등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몇 개의 창 끝처럼 세운 펑크식 헤어 스타일로 고치고, 빨강, 검정색 라인으로 눈이나 코를 높였고, 여성의 드레스 같은 복장들로 무대에 올랐다. X의 멤버가 자유롭게 만들어 내는 비주얼은 하드 록이나 헤비메탈이라는 범주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었다. 그들의 화려한 비주얼보다 더욱 관심을 모은 것은 그들의 퍼포먼스였다. 요시키는 의자 위에 올라가 무대 바닥에 다이빙하고, 또 연주하는 멤버의 옆에서 폭죽과 로켓 불꽃을 점화했다. 때로는 드럼 스틱을 다발로 묶어 바닥에 던지며 갑자기 일어나 드럼 세트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X의 무대가 끝나면 그 근처는 발 디딜 틈도 없이 난장판이 되었다. 또한 무대 세트나 조명 기구가 깨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다른 출연밴드와 라이브하우스를 운영하고 있는 부킹매니저는 실시간으로 폭주하고 과격한 X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통제 불능인 X는 연주 중에 관객과 싸우기도 하고, 자신들의 악기나 가게 의자나 테이블까지 던지고 부수기 일쑤였다. 곧 X는 라이브 하우스 측으로 부터 더 이상 공연을 하지 말아달라는 갑작스런 통보를 받게 된다. X가 [[경원]]시 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거친 뒤풀이 때문이었다. 라이브 후의 술집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의 뒤풀이에는 항상 100여 명을 넘는 친구와 팬들이 모여 초대형 파티처럼 되었다. 원샷을 반복한 요시키는 가게 안을 파괴하는 소동을 자주 일으켰다. 공연 후 선술집에 가서 퇴근길의 직장인이 요시키의 머리 모양이나 신기한 옷차림에 사소하게 시비라도 걸면 처음에는 차분하게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격발할 상태로 싸움이 일어났다. 컵이나 접시를 깨고 벽과 창문을 깨고 탁자와 다다미까지 뒤집어 부수었다. 같이 있던 멤버들이나 친구들은 폭발하는 요시키를 보고 도망가거나 말리기도 했지만, 그래도 요시키의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만취상태의 요시키는 술병을 안은 채 [[야마노테선]]의 첫차를 타고 다리를 쭉 뻗고 잠이 들어버리기도 했다.[* [[야마노테선]]은 [[서울 지하철 2호선]]처럼 순환선이여서 종점역이 없다. 또한 도쿄 지하철에서 이용객이 제일 많은 노선이다.] 출퇴근 혼잡 시간에 수 만 명이 타고 내리는 [[야마노테선]] 안에서 금발에 화장을 한 차림의 청년이 쓰러져 있어도 말을 걸어 깨우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다. 오후에 눈을 뜬 요시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날 폭발했던 주점의 "출입 금지"통보와 거액의 손해배상 청구서였다. 만원의 라이브에서 얻은 매출도 그 대부분이 이 파괴 행위의 변상금으로 사라졌다. 주위의 것들을 파괴했던 요시키에 대한 별명은 "도화선이 없는 다이너마이트"이었다. 요시키가 왜 그렇게까지 분노하고 날뛰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X는 폭풍같은 격렬함으로 빠르게 돌진하기 시작했다. 인디레이블의 DADA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보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라이브 하우스에서 연주를 시작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서였다. 요시키는 기꺼이 수락했고, 그가 X를 위해서 작곡한 최초의 오리지널 곡 "I'LL KILL YOU"를 녹음하게 되었다. [[1985년]] 6월에 발매된 1000장의 음반은 단 몇 일만에 품절된다. X는 그대로 상승 기류를 타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불안요소도 있었다. 요시키의 존재가 부각 될수록 멤버 간의 단결력은 약해져만 갔다. 요시키와 그런 요시키를 지지하는 [[Toshl|토시]]는, 라이브 하우스에서 연주하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아츠시와 대립구도가 생기게 되었다. X는 균열이 생기고 마침내 아츠시는 X를 떠나고 만다. 이후 X는 파트타임으로 연주를 맡아 주는 베이시스트에 의존해야만 했다. X의 베이시스트는 누가 될 것인가. 계속 생각한 요시키가 말을 걸었던 사람은 바로 [[TAIJI|타이지]]였다. DMENTIA라는 밴드의 공연에서 타이지의 퍼포먼스를 바라본 요시키는 그의 스타일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마침 활동을 잠시 쉬고 있는 [[TAIJI|타이지]]에게 요시키는 전화를 걸어서 밴드 가입을 권유했다. >"타이지, 우리 밴드도 지금 베이스가 없는데 괜찮다면 함께 해줄 수 있어?" > [[TAIJI|타이지]]는 X의 라이브를 본 적도 없을뿐더러 그들의 악평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요시키의 권유를 수락하지 않았다. 요시키는 X의 연주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려주고 X에 가입해달라고 한번 더 부탁했다. 하지만 X의 연주는 타이지가 추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타이지가 하고 싶은 음악은 [[주다스 프리스트]]와 같은 헤비메탈이었다. 타이지는 X에 가입하지는 않았으나 요시키는 그 뒤에도 자주 타이지를 불러내었다. 곧 두 사람은 돌아다니며 술 마시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타이지는 요시키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TAIJI|타이지]]는 요시키에게 하나의 조건을 내세우며 밴드가입에 대해 말을 했다. "기타 멤버를 바꿔주면 X에 들어갈게. 난 TERRY랑은 같이 할 생각 없어. 내가 데려오는 기타리스트를 넣어준다면 멤버가 될게." 요시키는 망설였다. 베이시스트 확보는 급선무이며, 타이지의 강렬한 개성에 매료되어 그 조건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타이지는 곧 HALLY라고 불렸던 기타리스트 [[https://www.discogs.com/artist/1173544-Yoshifumi-Yoshida|요시다 요시후미]]를 데리고 왔다. 힘든 결단이었지만, 요시키는 결성시의 원년 멤버인 TERRY를 내쫒고 기타리스트를 교체하게 된다. 트윈기타를 목표로 요시키가 지목한 다른 기타리스트는 [[PATA|파타]]였다. 파타는 BLACK ROSE라는 밴드의 해산 후에 자신이 만든 JUDY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다가 이 밴드마저 해체하게 되면서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전에 파타가 리더를 하던 JUDY에서 요시키가 땜빵 드러머를 해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파타가 고교시절 EastWest의 [[치바현]] 대회에서 베스트 드러머상을 수상한 요시키를 기억하고 JUDY로 영입하려 했었다. 그러나 당시 요시키는 거절하였다. 대신 이번에는 반대로 요시키가 파타에게 밴드가입을 권유한 것이다. 파타는 바로 승낙하였다. 당장 비디오테이프 대여점 아르바이트 생활에 싫증이나 빨리 기타를 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85년]] 여름, 외모도 연주도 과격해지는 요시키가 새로 편곡한 [[紅(X JAPAN)|쿠레나이]]를 무대에 선보이며 음악적으로도 진화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라이브에 모인 관객들은 [[紅(X JAPAN)|쿠레나이]]를 듣고, 더없이 빠른 드럼에 맞춰 머리를 흔들며 고조되는 사운드 속에서 몸을 흔들었다. [[紅(X JAPAN)|쿠레나이]]는 강한 비트와 속도감과, 헤비메탈과 하드코어 펑크의 막강함을 나타냄과 동시에 슬프고 애절한 멜로디와 극적인 가사로 팬들의 마음을 휘어잡고 있었다. 이 곡은 그동안의 헤비메탈 곡들의 분위기와는 상당히 달랐다. 이것이야말로 요시키가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력한 연주로 팬들은 늘어갔지만, 멤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TAIJI|타이지]]는 결국 요시키와 음악적인 차이점을 좁히지 못한 채 X를 떠났다. 타이지는 요시키에게 보컬의 샤우팅과 곡에서 리프를 강조하는 게 헤비메탈의 진수라고 주장했다. 반대로 고정관념을 가지지 않고, 펑크 음악의 장점을 메탈에 도입하던 요시키는 전체적인 리프와 편곡에도 적극 나서고 있었다. 의견차이로 인해 [[TAIJI|타이지]]와 기타의 HALLY가 떠나고, 무대에 서지 않게 되자 [[PATA|파타]]도 다시 아르바이트로 돌아갔다. 타이지의 밴드가입 조건 때문에 밴드멤버에서 TERRY를 쫒아낸 것을 깊이 후회했던 요시키는 TERRY를 찾아가 진심으로 사과했다. 요시키는 TERRY에게 다시 한 번 밴드가입을 권유했다. 그러나 TERRY는 거절하였다. X 멤버의 오디션은 계속되었고, 요시키 스스로 멤버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멤버 후보는 수십 명도 넘었지만 뽑아도 한번 참여하고 곧 그만두기 일쑤였다. 이유는 다양했다. 헤비메탈과 펑크를 융합시키면서 클래식 음악을 조화시킨 곡은 록이 아니라고 무시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신입 멤버가 부담이 됐던 것은 요시키가 강요하는 엄청난 연습량이었다. 즐기는 정도의 라이브에서 볼 수 없을 정도의 꾸준한 연습을 매일 반복하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멤버는 "연습 시간이 너무 많아서 못 해먹겠다!"라며 질려하며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요시키는 음반을 내기로 마음을 먹는다. X가 갑자기 인디 레코드를 발표하면 주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보통은 주로 라이브 하우스나 콘서트에서 밴드음악을 평론가들이 듣고 대형 음반사의 프로듀서와 감독이 스카우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요시키는 누군가가 깔아준 레일을 걸으며 정해진 길을 달리는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처음 라이브 하우스에서 공연하는 방법을 몰랐던 것처럼 음반을 제작하기 위한 방법도 알 수 없었다. 요시키는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레코드를 만들기 위해서 그 과정을 처음부터 배우기로 결심했다. "어떻게 하면 레코드가 만들어 질 수 있는 걸까?"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요시키의 행동은 단도직입적이었다. 우선 실제로 레코드를 찍어내는 공장으로 찾아갔다. "죄송합니다만, 저희가 음반을 내고 싶은데 얼마를 내야 만들어 주실 수 있나요?" 프레스 공장의 직원은 1000개 단위의 프레스 요금의 가격표를 요시키에게 주었다. 자료를 가지고 수십 만 엔을 지불하면 레코드는 만들 수는 있다. 그의 조사는 더 이어졌다. "레코드 재킷은 어떻게 하면 되는거지?" 이번에는 인쇄 공장을 찾아갔다. "얼마를 내야 앨범 재킷을 만들수있나요?" 인쇄 공장에서도 가격표를 입수한 요시키는 다음에 문자나 일러스트 디자인을 누구한테 의뢰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문자나 일러스트를 디자인하는 것은 사진 가게일까?" 사진 공방에 나간 그는 거기서도 방법과 요금을 물었다. 이제 음반을 만들기 위한 공정과 대범한 예산은 머리에 어느 정도 들어가 있었다. 실무를 완전히 파악한 요시키는 다음에 세일즈를 위한 방법을 생각했다. "어디에 가져다 놓아야 일반 사람들에게 레코드를 팔 수 있을까?" 음악 잡지를 빈틈없이 읽은 요시키는 인디 음반을 취급하는 레코드 가게가 전국에 있음을 알고 모든 레코드가게 목록을 만들었다. 그는 소년 같은 탐구심으로 음반 제작부터 판매까지 루트를 캐고 그것을 곧 행동으로 옮겼다. 음반 제작을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요시키는 송금의 대부분을 사용했으나 그래도 충분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에게 생활비를 올려달라고 부탁했다. 음반 제작 때문이라고 들은 엄마는 일단은 요시키의 요구에 응했다. 그러나 아들의 요구액은 달마다 늘어 갔다. 어머니는 걱정하며 그냥 평범하게 살아달라고 아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는 다음 달 생활비를 줄여서 보냈다. 19세 청년에게는 이미 충분한 액수였지만, 음반제작 중에 송금의 감액은 큰 타격이었다. 요시키는 매일 출연하는 제이브 하우스와 리허설을 하는 임대 스튜디오를 편도 2시간을 소비하며 다니고 있었다. 시간이 너무 걸려서 메지로에 사는 고교 후배 집에 들렀다. 요시키는 그 후 3개월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후배의 아파트에 얹혀살기로 한다. 여섯 평짜리 단칸방에서 공동생활은 아파트에서 느긋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레코드를 만들기 위해서는 잠자는 장소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요시키는 집에 놀러 온 또 다른 후배에게 검은 받침에 흰색 펜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 지금부터 말 그대로 써줘." 요시키는 뇌리에 떠오르던 그 단어의 철자를 하나씩 말했다. 후배는 요시키가 부르는 대로 받아 적었다. >"E.X.T.A.S.Y. 이거요?“ > >"엑스터시! 이게 내 레코드 회사의 이름이야.“ > >요시키는 일어나서 밖으로 나와서 아파트의 문에 그 밑받침을 본드로 붙였다. > >"그래, 오늘부터 여기는 나의 레코드 회사다." > ||[[파일:ExtacyRecord.jpg|width=500]]|| || 주식회사 엑스터시 레코드 로고[* 나중에 여기서 LADIES ROOM, ZI:KILL, LUNA SEA, TOKYO YANKESS, GLAY등 수 많은 유명 밴드가 인디 데뷔를 하게된다..] || 인디 레이블은 메지로의 작은 아파트의 일실에서 탄생하게 된다. 그렇게 선언한 날로부터 요시키는 사업가로서의 얼굴도 가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상품의 음반을 내고 그것을 파는 것이다. 사업에 대한 의욕의 피가 몸 안에서 끓고 있었다. 레코딩 등의 제작비와 레코드매출 관리, 세금신고 등 회사에 필요한 시스템은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었다. 사업 의욕에 대한 열정의 피가 끓고 있었다. 녹음 등의 제작비와 레코드의 매출관리, 세금신고 등 회사에 필요한 준비는 차질 없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회사 설립을 위한 책을 닥치는 대로 구입해, 며칠 밤을 새우며 독파한 요시키는 포목사업을 운영하셨던 어머니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어머니는 포목점을 운영했던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여 업무에 관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엑스터시레코드의 설립은 이렇게 완료했다. 요시키가 사장에 취임한 것은 그가 20세를 맞기 직전이던 19세였다. 사장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0명의 직원의 영세 레코드 회사는 요시키에게 특별한 변화를 가져다주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이 레코드 회사가 라이브 하우스의 관객뿐만 아니라 더 많은 록 팬들에게 X의 음악을 알리기 위한 발판이 될 거라 믿었다. 녹음 준비를 진행하면서, 요시키는 JUN이라는 기타리스트와 HIKARU라는 베이시스트를 찾았다. 테크닉에 대해서도 더할 나위 없는 두 사람은 요시키의 록에대한 열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1986년]] 4월, X에게는 2집 싱글 음반인 "オルガスム"(오르가즘)이 발매됐다. 인디 레코드를 취급하고 있는 레코드 가게를 외우고 있었던 요시키는 스스로 전화를 걸어 레코드를 놓아 주도록 부탁했다. 레코드 가게의 대부분은 사운드에 흥미를 가지고 각각 1장 1000엔의 싱글을 10장 정도 주문했다. 메지로에 있던 후배의 아파트를 나오고, 이전 아파트보다 훨씬 낮은 월세의 아파트로 이사한 요시키는 자기 방에 완성된 레코드 2500장을 모두 운반, 구분하고 골판지 상자에 담는 작업을 직접하고 있었다. 종이와 레코드에 깔린 방에서 누워서 잠도 편히 자기 힘들었지만, 음반을 팔기 위해서라면 어떤 성가신 것도 남에게 맡기지 않았다. 잡지를 손에서 놓지 않았던 요시키는 레코드 보도와 재킷 제작의 경우뿐만 아니라 직접 음악 잡지의 편집부에 문의하여 광고를 게재 하는 방법을 파악했다. 관리 업체를 통해 의뢰하거나 직접 잡지사에 의뢰 할 수도 있다고 배운 요시키는 실제 필요한 경비가 얼마나 드는지도 알아보았다. 거기서도 요금표를 손에 넣은 요시키는 잡지의 판매 부수에 따라 광고비가 페이지별로 세세하게 나뉘어져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시키가 수십 만 엔의 광고비를 마련하여 "オルガスム"(오르가즘) 광고를 음악 잡지에 올리자 반응은 모든 곳에서 터졌다. 인디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고 이를 위한 광고비까지 스스로 부담하는 등 전례 없는 행보에 팬들은 물론 라이브 하우스 관계자들은 그런 요시키의 대담성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또한 요시키는 뜻밖의 일에서 인지도를 올리게 된다. 높은 시청률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무대에 출연한 것이다. 광고 및 방송 출연으로 X를 둘러싼 환경은 소리를 내며 변화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고 요시키를 알게 된 팬이 대거 콘서트에 몰려들어 라이브 하우스에서 관객 동원 수는 증가하고 있었다.[* 80년대 후반 "밴드붐"이라는 용어가 방송 및 언론에 등장할 정도로 밴드 음악이 유행했던 일본의 당시 사회 분위기상 공중파, 지상파 가리지 않고 밴드는 각종 오락 방송의 섭외 대상 1순위였다. 본격적으로 무명의 아마추어 밴드들을 섭외해 매력발산의 기회를 마련한 いかすバンド天国, 原宿歩行者天国 등의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다만 이러한 시류 속에서도 메탈밴드들은 정통 음악방송이 아닌 이상 TV출연을 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금기가 있었는데, X는 이러한 금기 따위 가볍게 무시하는 행보를 보여줬다. 지역 민영방송국을 위주로 오락 프로도 가리지 않는 적극적인 TV 출연을 통해 얼굴을 알린 결과, 인디 때부터 관동에서는 나름대로의 인지도를 쌓아가고 있었다.] X가 굉음을 내며 빠르게 돌진을 시작한 것을 요시키는 확실히 실감하고 있었다. 라이브로 매출을 모으고, 저렴한 중고 밴을 구입한 요시키는 【오르가즘의 레코드 발매 기념 라이브 투어】를 계획하고 출발시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도쿄 지구, 나고야 지구, 한신 지구를 도는 대규모 순회는 X에게는 지금까지 없는 도전이었다. 본격적인 투어가 성공하면 활동 무대는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투어가 시작할 무렵 다시 멤버 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겨우 만난 멤버 JUN과 HIKARU가 요시키가 만드는 음악은 더 이상 하드 록이 아니며, 티비에 나오는 밴드는 하고싶지 않다며 요시키에 대한 반발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결정적으로 JUN과 HIKARU는 라이브 공연 도중 웃으면서 관객들에게 "앞으로 X와는 전혀 다른 밴드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본격적인 하드 록을 제대로 하는 밴드를요. 이 밴드는 그게 안 되니까요."라며 대놓고 요시키에게 [[엿]]을 먹이며 탈퇴를 발표했다. 결국 투어가 끝나고 두 사람은 X를 떠났다. 오르가즘은 첫판 2500장을 찍어 완판 되었지만, 레코딩에 참가한 JUN과 HIKARU가 탈퇴하면서 요시키는 앨범을 다시 찍기로 결정했다. X가 다시 드럼과 보컬만 있는 밴드로 되돌아간 후, 요시키는 자신 때문이라며 자책하고 있었다. [[1986년]] 후반이 되어서야 요시키는 X의 기타리스트와 베이시스트를 찾기 시작한다. 1년 전에 음악성의 차이로 X를 떠난 [[TAIJI|타이지]]와 다시 만나게 된 요시키는 다시 그를 불러내었다. 당시 타이지는 소속밴드가 없는 상태였다. 타이지는 말없이 요시키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드디어 베이시스트를 얻은 X는 밴드의 기둥이 되는 기타리스트를 찾아야했다. 요시키는 굉장한 속주로 알려져 있는 ISAO라는 기타리스트를 스카우트했다. 코쿠분지에 살고 있는 ISAO를 찾아가 밴드가입을 권유했다. 그는 흔쾌히 X의 가입을 승낙해 주었다. 요시키는 전례 없는 순조로운 멤버의 결정에 놀라면서 이번이야말로 X의 음악을 형성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며 들떠있었다. 요시키는 트윈기타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한 명이 더 필요했다. 요시키는 밴드 동료나 아는 사람 중에서 후보가 될 만할 기타리스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실력자는 많았으나 그의 이상을 구현할만한 사람은 단 한명. 요시키는 SAVER TIGER의 리더인 [[hide|히데]]를 생각했다. 요시키는 히데 이상의 기타리스트는 또 만날 수 없다고까지 생각하고 있었다. 요시키가 히데의 존재를 의식한 것은 라이브 하우스에 출연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될 무렵이었다. EXPLOSION 라이브 하우스에서 열린 SAVER TIGER의 소노시트[* 염화 비닐 등의 얇은 시트에 레코드와 같은 음구(音溝)를 새긴 것. 레코드판과 마찬가지로 픽업으로 재생할 수 있다. 최근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발매 기념 라이브를 보고, 그 실력 또한 엑스와 비슷한 형태의 밴드라고 느끼고 있었다. 마치 [[블랙 사바스(밴드)|블랙 사바스]]시절의 [[오지 오스본]]이 무대에서 박쥐를 물어뜯던 그 장면처럼 히데는 기타를 치는 중간에 날고기를 씹는 퍼포먼스로 관객을 압도하며 절대적 인기와 지명도로 고정 팬들도 꽤 형성하고 있었다. SAVER TIGER가 어느 밴드보다 빨리 라이브 하우스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메이저 데뷔를 한다는 이야기도 들려왔다. 주목의 대상이었던 히데 또한 요시키를 강렬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히데는 누구보다 자신에게 요시키가 관심 있어 한다고 밴드 동료로부터 듣고 있었던 것이다. X가 요코하마의 라이브 하우스에 출연했을 때 히데는 요시키에게 찾아가기로 결심한다. 히데는 쇼난 지역과 요코하마에서 특별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히데가 X의 콘서트에 찾아간다는 사실만으로 라이브 공연장에는 긴장감이 넘쳤다. 기타를 팽개치고, 드럼을 부수고, 무대에서 화약을 폭발시키는 X의 콘서트를 본 히데는 긴장한 표정으로 분장실로 향했다. 히데는 금발과 짙은 화장을 한 멤버들 사이에서 요시키를 찾고 있었다. 급히 화장실에서 뛰쳐나온 요시키는 반대로 히데에게 말을 걸었다. >"보러 와줘서 감사합니다. 제가 요시키입니다." > 요시키가 웃으며 히데에게 건넨 첫 마디였다. 무대에서 관객들에게 욕설을 하고 난폭했던 이미지와는 정반대인 모습이였다. 요시키는 라이브의 뒤풀이에 히데를 초대했다. 히데는 요시키의 권유를 순순히 받았다. 사람들로 가득찬 뒤풀이장에서 히데를 발견한 요시키는 사람들을 헤집고 히데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뒤풀이는 히데가 들었던 소문대로 거칠고 시끄럽고, 상상이상이었다. 함성과 웃음소리가 뒤섞인 뒤풀이 장소에서 요시키와 그보다 한살 위의 히데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느긋하게 말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자신들의 감각이 매끄럽게 서로 포개지는 것을 느꼈다. 이후 요시키와 히데는 라이브 하우스 외에 다른 곳에서도 자주만나 술을 마시게 되었다. 그런 히데에게 "X의 요시키와는 사귀지 않는 것이 좋아", "X와는 절대 함께 공연을 하지 않는게 좋아."라고 충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기까지 관심과 미움을 받고 있는 것에 놀랐던 히데는 오히려 그런 요시키에 대한 관심과 우정이 날로 커져만 갔다. 어느 날 SAVER TIGER가 요코하마의 라이브 하우스인 'Yokohama 7th AVENUE'에 출연하는 것을 들은 요시키는 시내에서 차를 몰고 달려갔다. 라이브를 본 요시키는 히데를 반드시 X의 멤버로 만들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뒤풀이에서 술을 진창 마신 요시키는 SAVER TIGER의 멤버가 나란히 있는 그 자리에서 외쳤다. >"히데! 엑스에 들어와!" > 요시키와 함께 뒤풀이에 참석했던 밴드 동료들이 황급히 손을 뻗어 요시키의 입을 틀어막았다. 가장 놀란 사람은 히데 본인이었다. 히데는 요시키의 팔을 잡고 조용히 그를 가게 구석진 곳으로 데려갔다. 히데는 요시키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얘기했다. SAVER TIGER의 다른 멤버는 구석에 있는 요시키를 째려보고 있었고, 언성을 높이는 멤버도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싸움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취한 SAVER TIGER의 멤버와 요시키는 서로 다투지도 않고 어깨동무를 하며 왁자지껄 웃으며 동이 틀 때까지 마시고 있었다. 요시키는 히데를 유혹하는 밴드가 많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키는 확신이 있었다. 히데가 X의 일원이 될 것을. "히데, 나와 너는 미래를 함께하게 될 거야" 요시키의 단호한 말에 히데는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사실, 멤버교체로 괴로워하던 것은 SAVER TIGER도 마찬가지였다. 인기의 절정에 있던 그들 역시 멤버 간에 삐걱거림이 생기게 되었고, 1986년 후반 히데는 결국 영혼을 태우던 자신의 밴드를 해산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히데는 제일 먼저 요시키에게 전화를 걸어 밴드 해산 소식을 전했다. 미용사 면허가 있었기에 요코스카로 돌아가서 미용사가 되겠다고 전했다. 요시키는 히데의 인생을 존중했기 때문에 X에 대한 가입권유는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2~3일 후 히데가 요시키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히데가 요시키에게 지금 뭐하냐고 묻자, 요시키는 지금 [[이케부쿠로]]의 임대 스튜디오에서 연습하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히데는 직접 보러가고 싶다고 하고 요시키는 승낙했다. 몇 시간 후에 요시키, 토시, 타이지, 이사오는 히데를 맞이했다. 히데가 스튜디오 바닥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4명의 리허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후 8시부터 시작된 합주가 끝난 시각은 새벽 2시를 넘은 시간이다. 요시키는 히데에게 술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요시키는 히데가 밴드를 해산한 후 마음의 정리가 아직 안되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 아픔을 생각한 요시키는 위로의 말이나 동정의 말은 하지 않았다. 정신없는 대화 속에서 히데는 요시키에게만 들리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X는 아직 기타를 찾고 있는거야?" "응." 요시키가 대답하자 갑자기 히데가 소리를 질렀다. "나 돌아갈래!" 요시키는 귀에 들어 온 말의 의미를 이해하면서도 반문하지 않았다. 히데에게 X나 요시키의 악평 등은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밴드 SAVER TIGER를 잃은 아픔을 헤아려줄 수 있는건 오로지 요시키 밖에 없다. 히데는 그렇게 생각했다. >"난 오늘부터 X다!" > 그 말을 들은 요시키는 참고 있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그것은 다른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기타리스트 중 최고라고 확신한 남자가 드디어 X의 멤버로 오게 된 것이다. 1986년 연말, X는 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기타 이사오가 오토바이 사고를 일으켜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밴드 활동을 중지할 수밖에 없었다. X는 꼭 트윈기타로 갔으면 좋겠다는 히데의 생각에 요시키도 같은 생각이었다. [[1987년]] [[1월 2일]] 요시키는 한 기타리스트에게 전화를 했다. 자주 X에 헬퍼로 참여해주고 있던 [[PATA|파타]]였다. "Stab Me In The Back"라이브와 "No Connexion"의 레코딩을 끝낸 후 다시 아르바이트하러 돌아온 파타였지만 그도 아직 본격적인 밴드 활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요시키가 파타에게 재가입을 권유하자 파타는 망설임 없이 수락하였다. 요시키는 마침내 5명이 갖춰진 것에 감격했다. 매일 만나 연습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멤버들과 연습없는 날도 다음날 아침까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임대 스튜디오 근처에 있는 식당에 들어설 때마다 요시키는 "나에게는 또 하나의 가족이 생겼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이후 X는 Extasy Records를 통해 [[VANISHING VISION]]을 발매하고 이 앨범은 오리콘 차트에까지 오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